(엔지니어링데일리)조항일 기자=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미권에서도 한중일과 마찬가지로 설계와 시공의 분리발주 형태가 오랜시간 지속됐다. 하지만 내수시장의 성장이 둔화되면서 자연스레 전세계로 눈을 돌렸다. 무대가 바뀌다보니 더 이상 정부주도의 방식으로는 한계에 봉착했고 2008년 터진 글로벌금융위기로 공기단축과 비용절감이 절실해지면서 PMC가 본격화됐다. 변화를 받아들인 영미권은 20여년전부터는 건설분야 실적이 줄어드는 대신 엔지니어링분야는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체질 전환에 성공했다.
일찌감치 PMC에서 두각을 드러낸 영미권의 업체의 글로벌 실적은 타국의 어느 업체와도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ENR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상위 50대 기업 중 1~10위는 제이콥스, 에이컴, 벡텔 등 민간 컨설팅사가 차지했는데 국내에서의 실적을 기반으로 해외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시류를 아예 모른척 한 것은 아니다. 2020년 국토부는 건설엔지니어링 발전방안을 통해 건설산업 고부가가치화와 기술협 입찰 병폐 근절을 위해 설계사 주도 턴키를 제시했다. 한국의 통합발주 관행이 시공사 중심으로 이뤄지다보니 설계능력이 아닌 로비에 따라 낙찰자가 선정되는 폐해를 없애고 동시에 엔지니어링사의 기술력을 전면에 내세워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두가지 목적에서 나온 방안이었다.
당시 국토부는 크게 세가지 모델을 제시했는데 ▲설계+PM 통합 수행 ▲설계사 주도 공동도급 ▲설계사 단독도급이 그것이다. 먼저 설계+PM은 발주청이 기본설계 단계에서 설계사를 선정하고 이후 설계사가 발주자 요구를 반영해 사업 전체를 관리하는 구조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PMC에 가장 근접한 모델이다. 설계사 주도 공동도급의 경우 엔지니어링사가 컨소시엄 대표가 돼서 건설사와 공동도급을 하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 엔지니어링사가 계약의 주체가 되는 모델이다.
설계사 주도 턴키는 설계사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복잡하게 얽혀있는 건설엔지니어링의 문제점들을 상당수 해결할 수 있는 카드로도 여겨졌다. 건설엔지니어링사는 이공계 기준으로 열악한 임금과 환경에 노출돼 있었다. 설계사 주도 턴키가 도입 되면 주계약자가 엔지니어링사로 바뀌는만큼 설계대가 투명화로 영업이익률도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목소리가 상당했다.
▲기득권 놓치 못하는 발주청-시공사
설계사 주도 턴키 논의가 나오면서 정부는 PMC 형태의 시범사업을 발주했다. 국토부는 도로, 항만 등 소규모사업부터 PMC를 시범적용하기로 했고 2022년 한국도로공사의 신탄진 하이패스IC 설치공사와 해양수산부의 용호부두 방파제 연장공사가 선정됐다.
그러나 시범사업을 추진하면서 제도적 한계에 부딪쳤다. 현행법상 건설공사는 시공사만 수주가 가능하고 설계사는 하도역할로 제한돼 있어 엔지니어링사가 주체가 되려면 입찰자격부터 손질이 필요했다. 시공실적 등 PQ 평가항목도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발주청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친 두 사업은 각각 유찰되고 사업이 좌초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당해연도 발주를 끝으로 PMC 사업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 PMC가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법제도 이외에도 발주청과 시공사가 발주과정에서 기득권을 놓아야만 해서다. 발주청은 스스로 발주자의 권한 지위를 내려놓아야만 하고 시공사 역시 설계사와 갑을의 관계가 바뀔 수 밖에 없는게 PMC의 구조다. 한국 산업화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위상이 작용한 탓이겠지만 조직이 비대하고 목소리가 크면 지위가 올라가는 한국 특유의 정서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에는 여전히 한국 엔지니어링사 중 PMC 능력을 갖춘 회사는 손에 꼽힌다. 예전보다 PMC 수주를 한다고 하지만 도로공사, LH와 같은 공공기관 실적에 엔지니어링사가 서브로 붙는 팀코리아 형태가 유일하다. 일은 엔지니어링사가 다하고 공로는 발주청이 다 가져간다는 볼멘 소리가 나와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PMC 수행가능한 엔지니어 양성도 숙제
2019년 도화엔지니어링이 페루에서 수주한 페루 친체로 신공항 사업의 규모는 360억원 정도였지만 6,000억원 이상에 달하는 사업비를 컨트롤하는 지위를 획득한만큼 파급효과는 상당했다. 실제 이 사업에서 현대건설은 부지정지 사업과 본공사에서 낙찰사로 선정되면서 PMC 효과를 입증했다.
도화는 친체로 사업에서 발주청인 페루 정부를 대신해 건설사, 감리사 선정 지원, 공사계약관리, 공정품질관리, 시운전, 초기 공항운영지원 등 사업전반에 대한 총괄 업무를 수행하는 계약을 했다. 다만 실제 PMC 업무가 가능한 단장급은 공항공사에도, 도화에도 없어 해외에서 엔지니어를 채용했다.
PMC 수주는 단순 설계감리를 떠나 프로젝트를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PMC 수주가 없으면 관련 지식을 가진 엔지니어도 나올 수 없다. 단순하게 애국심으로 한국 엔지니어를 단장에 앉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엔지니어를 써야 가격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PMC를 경험한 엔지니어가 많아야 한국의 엔지니어들이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펼칠 수 있고 그 경험들이 쌓여 국가의 자산이 되고, 국내 건설엔지니어링 산업의 뼈대를 튼튼히 할 수 있어서다.
세계 시장에서 PMC 인력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과거 국책사업급을 중심으로 발주되던 PMC 사업은 수년전부터 MDB사업에서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사람의 경쟁력이 국가경쟁력으로 연결되고 있는 시장이 바로 건설엔지니어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