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억원짜리 사업에 주관사인 A사는 70%, 서브사인 B사는 30%의 지분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운이 없게도 발주청에 손해를 입혔다. 일반적이라면 지분률대로 발주청에게 손해배상을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B사가 경영상의 이유로 폐업을 했다. A사가 배상해야할 몫은 얼마일까. 100%다. 억울한 A사는 발주청에 소송을 걸지만 대부분 반전은 없다.
언제나 똑같은 결말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위와 같은 경우 주관사가 손해배상을 모두 부담하는 판례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대부분 소송까지 가는일은 없다. 사업이 잘못되면 그저 살아남은 놈이 모두 독박을 써야 한다.
지난해 무너진 도림보도육교 사고와 관련해 천일의 행정처분 청문회가 진행중이다. 2015년 발주된 이 사업에서 천일은 1억원 규모의 기본실시설계를 맡았다.
설계인지, 시공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감리가 문제인지 시시비비가 불분명한 가운데 사업당시와 비교해 한가지 변수가 생겼다. 시공사가 망했다. 감리라도 민간업체가 수행했으면 좀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발주청 직접감리가 이뤄졌다. 남겨진 건 천일뿐이다.
설계의 잘못이 아니라면 근심할 이유가 없겠지만 사고가 나면 누군가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한국 특유의 정서가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게 하고 있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점, 지방계약법 시행규칙상 설계부실에 대한 입찰제한 규정은 없다는 점이다.
행정처분 결과는 지켜볼 여유가 있다 치더라도 진짜 문제는 손해배상이다. 발주청 입장에서 현재 청구서를 받을 수 있는 것 역시 천일뿐이다. 앞서 서울시 감사위도 발주청 재산상 손해와 보행자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판단에 따라 총 사업비인 32억원을 설계사인 천일에 배상하도록 했다. 설계의 문제라면 몰라도 시공상의 문제로 밝혀지면 그저 멀쩡한 회사가 과업수행 범위를 넘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30년전 부실문제로 재시공이 됐던 당산철교 손해배상에 대해 시공사가 독박을 썼던 것처럼 말이다.
천일뿐만이 아니다. 정부, 발주청은 그동안 어그러진 수많은 사업에 대해 오로지 민간에게 책임을 전가해 왔다. 명분은 국민의 세금으로 맡긴 사업이라는 점이다. 법으로도 명시돼 있다. 물론 엔지니어링업계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주사업의 80% 이상을 공공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업계 특성상 이러한 리스크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대외적 환경은 결국 엔지니어링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엔지니어링기본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시공사의 하자보증기간처럼 설계에 대해서도 설계보증기간을 적용해 엔지니어링사의 무한책임을 어느정도 덜어줘야 한다. 30년이 됐던, 50년이 됐던 그 책임을 살아남아 있는 한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저 망한놈만 속편한 대한민국이다.